피아노 암보 잘하는 법, 무대에서 하얘졌을 때 제가 한 것

무대 위에서 머릿속이 하얘지는 순간은 생각보다 조용하게 와요. 손은 분명 건반 위에 있는데 다음 음이 떠오르지 않고, 객석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은 몇 초가 지나가요. 저도 시험장에서 그런 순간을 겪어 봤어요. 그때 제가 한 건 급하게 다시 치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어요.

손을 잠깐 무릎 쪽으로 내리고 심호흡을 했어요. 그리고 속으로 크게 말했어요. 내가 연습했던 걸 믿는다. 정말 그렇게 문장으로 또박또박 말했어요. 그다음 손을 다시 피아노에 올려놓고 시작했어요. 몇 초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 호흡 한 번이 없었다면 아마 손이 더 엉켰을 거예요.

하얘졌을 때 많이 하는 실수가 바로 이어서 치려고 허둥대는 거예요. 마음이 급하면 손가락이 기억하던 길을 더 못 찾아요. 아무 데나 누르고 보는 순간 다음 마디까지 같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고요. 잠깐 멈추는 게 더 길게 느껴지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허둥대며 틀리는 소리보다 짧은 쉼이 훨씬 덜 어색해요.

한 프레이즈씩,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그럼 애초에 곡을 어떻게 외워야 덜 하얘질까요. 제가 쓰던 방법은 단순했어요. 곡을 프레이즈 단위로 잘라서 하나씩 외웠어요. 한 프레이즈가 손에 붙으면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앞에서부터 쭉 이어서 쳐 봤어요. 두 번째 프레이즈를 외우면 또 처음부터, 세 번째를 외우면 또 처음부터요.

이렇게 하면 시간이 꽤 걸려요. 앞부분은 수십 번 치는데 뒷부분은 몇 번 안 치게 되니까 비효율적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방식의 장점은 프레이즈와 프레이즈 사이, 그러니까 이음새가 단단해진다는 거예요. 외운 곡이 무너지는 지점은 대부분 한 덩어리가 끝나고 다음 덩어리로 넘어가는 곳이거든요. 조각조각은 다 아는데 연결이 안 돼서 멈추는 경우요. 처음부터 다시 이어 치는 습관은 바로 그 연결 부위를 계속 확인하는 연습이었어요.

여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곡 중간중간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 지점을 몇 군데 정해 두는 것도 도움이 돼요. 새로운 주제가 시작되는 곳이나 조가 바뀌는 곳처럼 눈에 띄는 자리를 골라서, 거기서부터 바로 시작하는 연습을 따로 해 두는 거예요. 무대에서 길을 잃었을 때 맨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가까운 출발점에서 다시 이어 갈 수 있어요.

피아노 앞이 아닌 곳에서 외우기

외우는 시간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을 때만이 아니었어요. CD로 그 곡을 틀어 놓고 들으면서 제가 무대에서 그 곡을 멋지게 끝까지 치는 장면을 상상했어요. 조명 아래 앉아 있는 모습, 마지막 화음을 누르고 손을 떼는 순간까지요.

자기 전에는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고 허공에 손을 올려놓았어요. 그리고 곡을 처음부터 손가락으로 따라가 봤어요. 건반이 없으니 소리도 안 나고 손끝에 닿는 것도 없지만, 머릿속에서는 음이 이어졌어요. 이상하게 그럴 때 저는 웃고 있었어요. 잘 칠 거라는 상상을 하다 보면 표정이 저절로 풀리더라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웃음이 시험 앞둔 긴장을 꽤 덜어 줬던 것 같아요.

건반 없이 손만 움직여 보는 연습은 해 보면 금방 알게 돼요. 손이 멈칫하는 곳이 있어요. 소리가 없으니 귀에 기대서 넘어갈 수가 없고, 손 모양만으로 다음 음을 찾아야 하거든요. 그 멈칫하는 자리가 아직 확실히 외워지지 않은 곳이에요. 다음 날 피아노 앞에 앉으면 거기부터 다시 프레이즈를 쪼개서 쳐 봤어요.

외운 곡을 오래 붙잡아 두려면

한 번 외운 곡도 며칠 손을 놓으면 금방 흐려져요. 특히 시험이나 발표 직전에는 매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씩은 악보 없이 쳐 보는 게 좋아요. 대신 틀렸다고 그 자리에서 멈추고 고치지 말고, 끝까지 가 본 다음에 걸렸던 곳을 따로 연습하는 쪽이 실제 무대랑 더 비슷해요. 무대에서는 멈출 수가 없으니까요.

암보는 결국 여러 갈래로 기억을 겹쳐 두는 일 같아요. 손가락이 기억하는 길, 귀가 기억하는 소리, 눈으로 봤던 악보의 모양, 그리고 프레이즈가 어디서 끝나고 어디서 시작하는지에 대한 이해까지요. 하나가 끊겨도 다른 하나로 이어 갈 수 있으면 하얘지는 순간이 와도 다시 돌아올 길이 생겨요.

손으로만 외운 곡은 긴장하면 특히 잘 무너져요. 그래서 오른손과 왼손을 따로 악보 없이 쳐 보는 것도 좋은 확인 방법이에요. 양손으로 칠 때는 오른손 멜로디에 끌려 왼손이 그냥 따라오던 부분이, 왼손만 치려고 하면 막히는 경우가 꽤 있어요. 왼손 화음이 어떻게 바뀌는지까지 알고 있으면 오른손이 잠깐 길을 잃어도 왼손이 붙잡아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