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손가락 번호 악보에 적는 게 창피한 일이 아닌 이유

악보가 어려운 곡으로 넘어갈수록 아이들 책이 오히려 깨끗해져요. 바이엘이나 초급 교재를 칠 때는 책에 이미 번호가 인쇄돼 있으니 그대로 따라가는데, 체르니 30번을 지나 소나티네나 소품집처럼 악보가 복잡해지면 번호는 처음 몇 음에만 적혀 있고 나머지는 치는 사람이 정해야 해요.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연필을 안 드는 아이들이 늘어나요.

이유를 들어 보면 대부분 비슷해요. 이제 이 정도는 자기가 알아서 친다는 거예요. 손가락 번호를 책에 적는 건 처음 배우는 아이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걸 적는 게 조금 창피하다고 느끼는 거죠. 진도가 꽤 나간 아이일수록 이런 자신감이 강해요. 실력이 늘었다는 뜻이기도 해서 그 마음 자체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그 자신감이 연습 방법까지 건너뛰게 만들면 곡을 외우는 단계에서 꼭 탈이 나요.

전공자인 저도 번호를 적어요

곡을 외워야 할 때 저는 지금도 악보에 손가락 번호를 적어요. 전공을 했다고 손이 저절로 정답을 찾아가는 건 아니거든요. 번호를 정해 두지 않으면 같은 마디를 칠 때마다 이랬다저랬다 하게 돼요. 어제는 3번으로 넘어간 자리를 오늘은 4번으로 넘어가고, 빠르게 칠 때와 천천히 칠 때 손가락이 또 달라져요. 그러면 곡이 잘 외워지지 않아요.

피아노 암보는 머리로 음 이름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손가락이 어떤 순서로 움직이는지가 몸에 새겨져야 비로소 곡이 손에 붙어요. 매번 다른 길로 지나가면 몸은 어느 길을 기억해야 할지 정하지 못해요. 무대에서 외운 곡이 갑자기 끊기는 걸 보면 대개 평소에 손가락이 흔들리던 구간이에요. 긴장하면 머리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는데, 그 손이 두세 가지 방법을 섞어서 연습했다면 그 순간에 엉키기 쉬워요.

아이들이 번호 적는 걸 부끄러워할 때마다 저는 이 얘기를 그대로 해 줘요. 솔직히 저는 악보가 깨끗한 걸 실력의 증거로 여기는 마음이 조금 안타까워요. 숫자로 지저분해진 악보가 오히려 그 곡을 제대로 붙잡고 씨름했다는 흔적인데 말이에요.

번호는 정답을 베끼는 게 아니라 직접 찾는 것

그렇다고 아무 번호나 적어 두면 되는 건 아니에요. 제가 아이들에게 권하는 건 곡을 받으면 바로 연습에 들어가지 말고, 손이 애매한 구간을 먼저 여러 방법으로 쳐 보는 거예요. 엄지를 밑으로 넣어서도 쳐 보고, 손가락을 건너뛰어서도 쳐 보고, 다음 음 쪽으로 손을 미리 옮겨 놓고도 쳐 봐요. 그중에서 손목이 덜 꺾이고, 다음 음으로 넘어갈 때 가장 덜 어색하고, 소리가 끊기지 않는 방법을 고르면 돼요.

번호가 특히 중요한 곳은 몇 군데로 정해져 있어요. 손 위치가 크게 바뀌는 곳, 음계처럼 엄지가 손가락 밑으로 들어가거나 손가락이 엄지 위로 넘어가는 곳, 그리고 레가토로 이어 쳐야 하는 긴 선율이에요. 이런 자리에서 손가락이 모자라거나 엉뚱한 손가락이 남으면 음이 끊기거나 손을 급하게 점프시키게 돼요. 처음 연습할 때 이 구간들만 골라 번호를 적어 둬도 훨씬 수월해져요.

이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손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에요. 손 크기도, 손가락 길이도, 손가락 사이가 벌어지는 정도도 달라요. 악보에 인쇄된 번호는 편집자가 일반적인 손을 기준으로 적어 둔 거라 내 손에는 안 맞을 수도 있어요. 손이 작은 아이에게 편한 번호와 손이 큰 아이에게 편한 번호가 다른 경우도 흔해요. 그러니 남이 정해 준 걸 따라 하는 것보다 본인이 직접 쳐 보고 가장 자연스럽다고 느낀 번호가 훨씬 오래 가요.

정한 번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연필로 적어요. 볼펜은 안 돼요. 연습하다 더 편한 방법을 찾으면 지우고 고쳐야 하니까요. 그리고 적은 다음부터가 진짜 중요해요. 처음 칠 때부터 그 번호대로만 쳐야 해요. 한 손씩 연습할 때도, 양손을 맞출 때도, 느리게 칠 때도 빠르게 칠 때도 같은 번호로요. 대충 쳐 보다가 나중에 번호를 맞추려고 하면 이미 손에 익은 다른 방법을 지우는 데 시간이 더 걸려요.

처음부터 번호를 정하고 연습하는 습관이 들면 곡 하나를 끝내는 속도가 확실히 달라져요. 처음 며칠은 번거롭다고 느끼지만, 그 며칠이 나중에 같은 구간을 수십 번 다시 치는 시간을 줄여 줘요. 특히 곡을 외워서 쳐야 하는 대회나 발표회를 앞둔 아이라면 이 차이가 더 크게 드러나요.

저는 새 곡을 외우기 시작할 때면 지금도 연필부터 옆에 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