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서 무너진 스물네 살 천재
1897년 3월, 스물네 살의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교향곡 1번 초연을 앞두고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어요. 그런데 이 공연은 시작부터 삐걱거렸어요. 지휘를 맡은 사람은 당대 유명 작곡가였던 알렉산더 글라주노프였는데, 그가 무대에 오르기 전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전해질 정도로 준비가 엉망이었어요. 오케스트라는 곡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고, 지휘자는 박자를 놓치기 일쑤였어요.
결과는 참혹했어요. 저명한 작곡가이자 평론가였던 세자르 큐이는 이 곡이 지옥에 있는 음악원이라면 일등상을 받을 만하다는 혹평을 남겼고, 다른 평론가들도 앞다퉈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어요. 라흐마니노프 본인은 이 공연 도중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극장 밖으로 뛰쳐나가 계단에 주저앉아 귀를 막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요. 자신이 몇 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을 지켜봐야 했던 셈이에요. 훗날 그는 이날의 실패가 자신의 음악 인생 전체에서 가장 쓰라린 순간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간
이날의 실패는 단순한 나쁜 리뷰로 끝나지 않았어요. 라흐마니노프는 이후 완전히 무너져버렸어요. 훗날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날 이후 마음속에서 뭔가가 뚝 끊어졌다고 표현했어요. 하루의 절반을 소파에 누워 망가진 인생을 한탄하며 보냈고, 그 어떤 것에서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고 고백했어요. 삼 년 가까이 새로운 곡을 거의 쓰지 못했고, 피아노 연주와 오페라 지휘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게 전부였어요.
주변 사람들도 손을 놓고 있지만은 않았어요. 라흐마니노프는 존경하던 대문호 톨스토이를 직접 찾아가기도 했는데, 이 만남조차 별다른 위안이 되지 못했어요. 오히려 자신이 쓴 가곡에 대해 다시 한번 혹평을 듣고 더 깊은 자기 회의에 빠지고 말았어요.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가족들은 결국 니콜라이 달이라는 의사를 찾아가 보라고 권했어요. 마침 라흐마니노프의 이모가 비슷한 어려움을 겪다 이 의사에게 도움을 받아 회복한 전례가 있었기에, 가족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만남을 주선했어요.
최면 속에서 되찾은 확신
달 박사는 신경과 의사이자 아마추어 음악가로, 최면요법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어요. 1900년 1월부터 넉 달 가까이 라흐마니노프는 거의 매일 그를 찾아가 치료를 받았어요. 달 박사는 최면 상태에 빠진 그에게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어요. 당신은 협주곡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아주 수월하게 작업할 것이다, 그 곡은 뛰어난 작품이 될 것이다. 지금 들으면 다소 단순해 보이는 이 암시가, 실제로 라흐마니노프의 마음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치료가 이어지면서 그는 잠도 잘 자고 식욕도 되찾았으며, 무엇보다 다시 펜을 들 수 있게 됐어요. 그해 여름 그는 자신의 표현대로 새로운 음악적 아이디어들이 다시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고 해요. 그렇게 시작된 작업이 바로 피아노 협주곡 2번이었어요. 그는 이 곡의 2악장과 3악장을 먼저 완성해 그해 겨울 부분 초연을 가졌고, 이듬해 1악장까지 마무리해 전곡을 완성했어요. 흥미롭게도 정작 가장 큰 고비였던 1악장을 완성하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여전히 완벽에 대한 부담과 씨름하고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해요.
실패를 딛고 다시 선 무대
1901년 11월,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이 곡의 완전한 초연이 열렸어요. 결과는 삼 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청중은 열광했고, 이 곡은 순식간에 그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리 잡았어요.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자신을 절망에서 건져 올려준 달 박사에게 헌정했어요. 실패로 무너졌던 한 청년이,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준 사람의 이름을 자신의 가장 빛나는 작품에 새겨 넣은 셈이에요.
지금 이 곡은 그의 대표작을 넘어, 클래식 음악사에서 가장 사랑받는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로 남아 전 세계 무대에서 끊임없이 연주되고 있어요. 흥미롭게도 이 곡의 2악장 선율은 훗날 대중음악에서도 여러 차례 차용되어, 1975년 에릭 카먼의 히트곡 ‘올 바이 마이셀프’의 모티브가 됐고, 1996년에는 셀린 디온이 이 곡을 커버해 다시 한번 인기를 끌었어요.
참고: Utah Symphony 및 Redwood Symphony 프로그램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