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불명의 회색 사나이
1791년 여름, 모차르트에게 낯선 방문객이 찾아온다. 이름도 밝히지 않고 온통 회색 옷차림을 하고 있던 이 남자는 모차르트에게 죽은 이를 위한 미사곡, 즉 레퀴엠 한 곡을 써달라며 상당한 액수의 선금을 건넸다. 조건은 단 하나, 누가 의뢰했는지 절대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모차르트는 이 조건을 받아들였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방문객의 존재는 그의 마음 한구석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당시 모차르트는 이미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져 있었다. 오페라 마술피리와 티토 황제의 자비를 동시에 작업하느라 몸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고, 여기에 정체 모를 의뢰인까지 겹치면서 그는 점점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독살당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고, 이 레퀴엠이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장례식을 위한 곡이 될 것이라는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실제로 그는 아내 콘스탄체에게 이 곡을 쓰다가 자신이 죽을 것 같다는 말을 여러 차례 털어놓았다고 전해진다.
죽음을 예감한 손끝에서 태어난 음악
이런 불안한 심리 상태 속에서 작업한 레퀴엠은 유독 어둡고 격렬한 색채를 띠고 있다. 진노의 날을 뜻하는 디에스 이레 부분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합창, 눈물의 날을 노래하는 라크리모사에서 느껴지는 처절한 애수는 단순한 종교 음악을 넘어 한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마주하며 느낀 공포와 체념을 그대로 담아낸 듯하다. 특히 라크리모사는 겨우 여덟 마디를 작곡한 시점에서 그의 붓이 완전히 멈춰버렸는데, 이 여덟 마디가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직접 쓴 음악이라는 사실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결국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새벽, 레퀴엠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서른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가 정확히 어떤 병으로 죽었는지는 지금까지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급성 류마티스열이나 신장 질환 등 여러 가설만 존재할 뿐이다. 확실한 것은 그가 죽는 순간까지도 레퀴엠 작업에 매달렸다는 사실이며, 임종 직전까지 곁에 있던 사람들에게 팀파니 파트를 흥얼거려 지시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질 정도다.
이 대목에서 문득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하루하루 크고 작은 일에 치이다 보면 몸이 힘들다는 핑계로, 혹은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으로 쉽게 손을 놓아버릴 때가 많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죽음이 코앞에 닥친 순간까지도 마지막 음 하나를 더 채우려 애썼다. 결과물이 완벽하지 않아도 좋으니, 숨이 붙어 있는 한 끝까지 몰두하는 태도.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가장 배워야 할 부분은 이 마지막 순간의 열정이 아닐까 싶다.
미완성 악보를 둘러싼 은밀한 거래
모차르트가 죽은 뒤, 아내 콘스탄체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남았다. 이 곡을 완성해서 넘기지 않으면 이미 받은 선금을 돌려줘야 했고, 남은 잔금도 받을 수 없었다. 그녀는 급히 모차르트의 제자였던 요제프 아이블러에게 완성을 부탁했지만 그는 중간에 작업을 포기했고, 결국 또 다른 제자인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에게 마무리가 맡겨진다. 쥐스마이어는 모차르트의 필체를 흉내내 가짜 서명까지 남기며 완성본을 만들어냈고, 이 사실을 숨긴 채 의뢰인에게 전달했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정체불명의 의뢰인은 발제크 백작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세상을 떠난 젊은 아내를 추모하기 위해 이 곡을 의뢰했는데, 평소 다른 작곡가의 곡을 몰래 사들여 자신의 작품인 것처럼 연주회에서 선보이는 취미를 가진 인물이었다. 실제로 그는 완성된 레퀴엠을 자신이 작곡한 곡이라 속이고 아내의 추모 미사에서 연주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콘스탄체가 생계를 위해 이 곡의 사본을 다른 곳에 팔면서 진실이 세상에 드러났고, 결국 백작은 자신이 의뢰인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 인간의 마지막 두려움이 남긴 유산
이렇게 보면 레퀴엠을 둘러싼 신비로운 이야기들은 초자연적인 저주나 음모라기보다는, 죽음을 앞둔 한 인간의 불안한 심리와 그 이후 벌어진 지극히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뒤엉킨 결과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곡이 여전히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모차르트 자신이 정말로 자기 죽음을 예감하며 써 내려간 음악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자신을 위한 진혼곡을 스스로 작곡하다 세상을 떠난 작곡가는 음악사를 통틀어도 흔치 않다. 미완성으로 남았기에 더욱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 곡은, 지금도 듣는 이들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던 한 천재의 마지막 숨결을 전해주고 있다.
참고 자료: Classical Music, 모차르트 레퀴엠 관련 기사(classical-musi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