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표 숫자가 전부였던 어머님
피아노 레슨을 하는 사람은 결국 을의 입장이에요. 아이를 위해서라면 이건 아니라고 말해야 할 때가 있지만, 끝내 어머님이 원하시면 따를 수밖에 없는 순간도 있어요. 오래 가르치면서 그런 순간이 몇 번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마음에 남아 있는 아이가 한 명 있어요.
그 아이 어머님은 처음 상담 때부터 진도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몇 달 안에 어느 교재까지 갈 수 있는지, 다른 학원에서는 어디까지 나간다던데 여기는 왜 느린지 같은 질문이었죠. 아이는 아직 악보 읽는 게 서툴렀고 손 모양도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였어요. 그래서 지금은 한 곡을 제대로 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몇 번이고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어머님 생각은 바뀌지 않으셨어요.
나중에 알게 된 건, 어머님도 아이가 제대로 늘지 않는다는 걸 알고 계셨다는 거예요. 그래도 진도를 빨리 나가고 싶으셨던 이유는 동네 엄마들 사이에서 우리 아이는 피아노를 어디까지 배웠다고 말하고 싶으셨기 때문이었어요. 그 마음이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어요. 다른 집 아이와 비교되는 게 부모 입장에서는 얼마나 신경 쓰이는 일인지 저도 알거든요. 하지만 그 비교가 아이의 실력이 아니라 교재 이름으로 이루어진다는 게 답답했어요. 결국 저는 어머님 뜻대로 진도를 빠르게 넘겼어요. 곡이 손에 붙기도 전에 다음 곡으로, 교재가 끝나기도 전에 다음 교재로요. 그때 레슨을 하면서 마음이 편했던 날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진도만 나가면 생기는 일
피아노에서 진도라는 건 한 단계에서 익혀야 할 걸 다 익혔다는 표시예요. 교재가 바뀐다는 건 손이 그만큼 준비됐다는 뜻이어야 하고요. 그런데 이걸 거꾸로 하면, 교재 이름은 올라가는데 손은 처음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요.
교재마다 그 단계에서 꼭 챙겨야 하는 게 있어요. 바이엘에서는 악보를 읽는 눈과 둥근 손 모양을 만들고, 체르니 100번에서는 양손이 서로 다른 일을 하는 데 익숙해지고, 체르니 30번으로 넘어가면 손가락 하나하나가 고르게 움직이는 힘을 길러요. 앞 단계에서 빠뜨린 게 있으면 다음 단계에서 반드시 티가 나요. 집을 지을 때 1층이 덜 마른 상태로 2층을 올리면 금이 가는 것처럼요. 그래서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진도는 천천히 가도 기초는 절대 건너뛰지 말라는 말을 늘 해요.
그 아이가 딱 그랬어요. 악보에 적힌 곡은 점점 어려워지는데, 정작 악보를 읽는 속도는 처음과 비슷했어요. 새 곡을 받으면 한 음 한 음 계이름을 세어 가며 읽느라 한 줄 치는 데도 한참이 걸렸고, 그러다 보니 곡 하나를 끝까지 제대로 쳐 본 적이 거의 없었어요. 손 모양도 무너진 채로 굳었고, 빠른 패시지는 손가락이 아니라 손목을 휘두르며 겨우 넘어갔어요. 겉으로 보면 체르니 몇 번을 치는 아이였지만, 실제로 칠 수 있는 곡은 거의 없었던 거예요.
아이도 그걸 느꼈던 것 같아요. 어려운 곡을 받을 때마다 표정이 점점 굳어 갔거든요. 칠 수 없는 곡을 매주 받아 가는 건 아이에게 성취감이 아니라 좌절의 연속이었을 거예요. 그 아이는 결국 그 교재까지만 배우고 피아노를 그만뒀어요.
몇 년 뒤 다시 찾아왔을 때
그리고 시간이 꽤 흐른 뒤에 그 아이가 다시 레슨을 받으러 왔어요. 이번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진짜 피아노를 치고 싶어서 왔다고 했어요. 그 말이 반가우면서도 마음 한쪽이 무거웠어요. 예상했던 대로 그동안 배운 건 거의 남아 있지 않았거든요.
기억은 체르니까지 배웠다고 하는데, 막상 악보를 펴 보니 낮은음자리표부터 다시 짚어야 했어요. 손은 예전에 굳은 모양 그대로라 그걸 푸는 데도 시간이 걸렸고요. 결국 거의 기초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아이는 그때 정말 많이 아쉬워했어요. 그때 제대로 배웠으면 지금 이러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고요. 저도 그 말을 들으면서 그때 더 강하게 말씀드렸어야 했나 하는 생각을 오래 했어요.
그 일 이후로 진도 이야기를 꺼내시는 어머님들께는 교재 이름 대신 아이가 지금 혼자 칠 수 있는 곡이 몇 곡인지를 같이 봐 달라고 말씀드려요. 새 곡을 받았을 때 혼자 악보를 읽어 올 수 있는지, 예전에 배운 곡을 지금도 끝까지 칠 수 있는지 같은 것들이요. 그게 진짜 진도라고 생각하거든요.
다시 온 그 아이의 첫 레슨은 바이엘 중간쯤 나오는 짧은 곡으로 시작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