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예전의 저는 하농을 꽤 엄격하게 시키는 선생님이었어요. 레슨이 시작되면 무조건 하농부터 몇 번씩 치고 나서야 교재로 넘어갔거든요. 아이들이 한숨을 쉬어도, 지겹다고해도 “이걸 해야 손 자세가 좋아져” 하고 밀어붙였죠. 지금 돌아보면 그때 아이들 얼굴이 먼저 떠올라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하농을 좋아하는 아이는 정말 드물어요. 아이들 입장에서 보면 이유가 충분하죠. 멜로디다운 멜로디도 없이 똑같은 음형을 한 칸씩 올라갔다 내려오는 연습이 한 페이지 내내 이어지니까요. 피아노가 좋아서 시작했는데 매번 레슨 첫 10분을 지루한 반복으로 보내야 한다면, 어른이라도 싫을 것 같아요.
하농은 어떤 교재일까요
하농은 19세기 프랑스의 피아노 교육자 샤를루이 아농이 만든 손가락 연습곡집이에요. 우리나라에서는 영어식 발음을 따라 하농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죠. 원래 제목은 60개의 연습으로 이루어진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라는 뜻으로, 이름 그대로 60개의 짧은 연습이 담겨 있어요.
하농의 목적은 곡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손가락 자체를 훈련하는 거예요. 다섯 손가락을 고르게 쓰고, 특히 약한 4번과 5번 손가락의 힘과 독립성을 기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뒤쪽으로 가면 음계와 아르페지오, 트릴, 옥타브 같은 기술도 나오고요. 그래서 전공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지금도 꾸준히 쓰이는 교재예요. 매일 손을 풀고, 고른 소리와 빠른 속도를 만드는 기초 체력 같은 역할을 하거든요.
피아노를 배워본 분이라면 1번의 도미파솔라솔파미 음형이 아마 귀에 익으실 거예요. 이 여덟 개의 음을 한 칸씩 올려가며 건반 위를 오르내리는 게 하농의 기본 모양이에요. 단순해 보이지만 모든 손가락이 같은 크기와 같은 간격으로 소리를 내야 해서, 제대로 치려면 생각보다 집중력이 많이 필요해요.
내 생각이 바뀐 이유
그런데 레슨을 오래 하다 보니 한 가지 질문이 계속 마음에 남았어요. 이 아이는 왜 피아노를 배우고 있을까 하는 질문이요.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 대부분은 전공을 목표로 하지 않아요. 좋아하는 노래를 치고 싶어서, 악기 하나쯤 다룰 줄 알면 좋겠다는 부모님 마음에서, 친구가 다녀서 시작한 경우가 훨씬 많죠. 결국 이 아이들이 피아노를 배우는 이유는 평생 즐겁게 음악을 곁에 두기 위해서예요.
그렇다면 전공할 마음이 전혀 없는 아이에게 하농을 억지로 시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어요. 손가락이 조금 더 빨라지는 대신 피아노 자체를 싫어하게 된다면, 그건 제가 원래 바라던 방향과 정반대잖아요. 실제로 하농 때문에 레슨 오는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아이를 보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요즘은 방식을 바꿨어요. 전공을 생각하지 않는 아이라면 어머님께 먼저 솔직하게 말씀드려요. 하농은 손가락 훈련에 좋은 교재지만 아이가 많이 힘들어하고, 이 아이에게 지금 더 중요한 건 피아노를 즐겁게 오래 치는 것이라고요. 그리고 하농은 억지로 끝까지 하기보다 재미있게 해볼 수 있는 데까지만 배워보자고 말씀드려요. 대부분의 어머님들이 그 이야기를 들으시면 고개를 끄덕여 주세요.
하농을 재미있게 해보는 방법
그렇다고 하농을 완전히 버리는 건 아니에요. 아이가 흥미를 잃지 않는 선에서 조금씩 활용하면 분명 도움이 되거든요. 제가 자주 쓰는 방법 몇 가지를 소개할게요.
첫째, 한 번에 여러 번호를 치지 않고 하루에 한 번호만 짧게 해요. 길게 붙잡을수록 지루함만 커지니까요. 둘째, 리듬을 바꿔서 쳐봐요. 똑같은 음형도 점음표 리듬이나 셋잇단 리듬으로 치면 아이들이 게임처럼 받아들여요. 셋째, 셈여림을 바꿔 봐요. 한 번은 아주 작게, 한 번은 크게 치거나 점점 커지게 치면 단순한 반복에도 음악적인 재미가 생겨요. 넷째, 잘하는 곡을 치기 전 손 풀기로 딱 한 번만 쳐요. 하농이 목적이 아니라 좋아하는 곡을 잘 치기 위한 준비라는 걸 느끼게 해주는 거죠.
물론 전공을 준비하는 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그때는 하농이 왜 필요한지 충분히 설명하고 꾸준히 하도록 이끌어요. 결국 하농을 할지 말지는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 아이가 피아노로 어디까지 가고 싶은지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혹시 아이가 하농 때문에 피아노를 그만두고 싶어 한다면, 선생님과 한번 이야기해 보세요. 하농을 조금 줄이는 것만으로도 아이가 다시 피아노를 즐겁게 치게 되는 경우를 저는 여러 번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