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클라라 슈만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그의 남편 로베르트 슈만이 원래는 피아니스트를 꿈꿨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어요. 우리에게는 작곡가로 훨씬 익숙한 이름인데, 정작 그가 작곡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손가락 부상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늘은 그 사연을 좀 더 알아보려고 해요.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법대생
슈만은 원래 법학을 공부하던 청년이었어요. 그런데 음악에 대한 열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스무 살 무렵 법대를 그만두고, 라이프치히 최고의 피아노 교사였던 프리드리히 비크의 집에 아예 들어가 살면서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해요. 훗날 그의 아내가 되는 클라라가 바로 이 비크 선생의 딸이었으니, 두 사람의 인연이 이때부터 시작된 셈이죠. 슈만은 손가락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고 해요. 특히 넷째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비해 힘도 약하고 마음대로 잘 움직이지 않는 게 늘 고민이었다고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그는 손가락을 붙잡아 벌려주는 기계 장치를 구해 쓰기 시작했는데, 당시 비크 선생의 가게에서도 이런 손가락 강화 기구를 팔았다고 하니, 그 시절 피아노 학도들 사이에서는 꽤 흔한 방법이었나 봐요. 넷째 손가락을 나머지 손가락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겠다는 목표로 여러 장치를 직접 고안해 시도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지금 생각하면 스무 살 청년의 열정이 조금 과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손가락, 그리고 알 수 없는 손 부상
문제는 그다음부터였어요. 오른손 손가락, 특히 넷째와 다섯째 손가락에 마비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도 회복되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졌다고 합니다. 손가락 감각이 무뎌지고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결국 그는 그렇게 바라던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어야 했어요. 재미있는 건, 정작 이 부상의 정확한 원인이 지금까지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이야기는 손가락 강화 기구를 무리하게 사용하다 다쳤다는 것이었는데, 최근 의학 자료들을 찾아보면 이 설명에 의문을 던지는 시각도 적지 않더라고요. 어떤 학자들은 당시 그가 받았던 매독 치료의 수은 성분이 신경에 손상을 줬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과도한 연습으로 생기는 국소성 근긴장이상, 그러니까 오늘날 일부 전문 연주자들에게서도 발견되는 신경학적 질환이었을 거라고 보기도 해요. 실제로 20세기의 명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도 이와 비슷한 손 질환으로 한창때 오른손 연주를 포기해야 했다고 하니, 슈만의 사례가 유독 특별한 일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의학 역사를 다룬 자료들에서는 지금도 이 사건을 두고 ‘정확한 임상적 진단은 끝내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정리하는데, 200년 가까이 된 일이니 어쩌면 당연한 결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잃은 것과 얻은 것 사이
이 대목에서 정직하게 말하자면, 손가락 장애를 딛고 위대한 작곡가가 됐다는 서사는 조금 미화된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부상을 극복한 게 아니라, 애초에 원하던 길이 막혀버린 뒤에야 다른 길을 찾아 나선 쪽에 가깝거든요. 실제로 그는 한동안 깊은 좌절과 우울에 시달렸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그 좌절이 그를 주저앉히지 않고, 음악 비평지를 직접 창간해 슈베르트나 쇼팽 같은 신인 작곡가들을 세상에 알리는 일과, 자기만의 곡을 쓰는 일로 방향을 틀게 만들었다는 점은 분명한 듯 합니다. 손가락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게 된 뒤로는 아내 클라라가 그의 곡을 무대에서 대신 연주해주는 평생의 동반자가 되어주기도 했고요. 훗날 그는 클라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연주할 수 없어 답답한 자신의 처지를 토로하면서도 그런 클라라를 두고 ‘나에게는 오른손이 있는 셈’이라는 취지의 말을 남기기도 했다고 해요. 만약 슈만이 원하던 대로 뛰어난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가 됐더라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그 수많은 가곡과 피아노곡들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잃은 것과 얻은 것을 함부로 저울질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가 막힌 길 앞에서 완전히 멈춰 서지는 않았다는 사실만큼은 오래 곱씹게 됩니다.
참고: Hektoen International – Robert Schumann’s hand injury, Interlude – Debunking the Top 5 Myths about Schuma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