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유로 뒤덮인 첫 무대
1904년 2월 17일,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 이탈리아 오페라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이 무대에 자코모 푸치니의 새 오페라 나비부인이 올랐어요. 당시 푸치니는 이미 라 보엠과 토스카로 명성을 쌓은 작곡가였고, 관객들의 기대도 상당했어요. 그런데 막이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객석에서 야유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어요. 휘파람 소리, 비웃음, 노골적인 조롱이 공연 내내 이어졌고, 결국 이 초연은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어요.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굴욕적인 밤이었다고 전해져요.
실패의 원인을 두고는 여러 해석이 있어요.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건 극의 구성 문제예요. 초연 당시 2막 구조로 짜여 있었는데, 2막이 지나치게 길어서 관객들이 지루함을 느꼈다는 지적이 많았어요. 게다가 무대 배경이 일본 나가사키였다는 점도 한몫했어요. 미국 해군 장교와 일본 여성 초초상 사이의 비극적인 사랑이라는 소재가 당시 이탈리아 관객들에게는 낯설고 이국적으로만 느껴졌을 가능성이 커요. 이야기에 몰입하기보다 생소함에 거리감을 느낀 관객이 많았던 셈이에요.
무대를 떠나며 남긴 맹세
초연이 처참하게 무너진 직후 푸치니의 반응은 격렬했어요. 그는 나비부인이야말로 자신의 최고 걸작이라며 밀라노 청중들을 향해 분노를 감추지 않았어요. 스스로 받기로 했던 출연료 전액을 반납하면서까지 남은 공연 일정을 전부 취소시켰고, 앞으로 평생 라 스칼라 극장에서는 자신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지 않겠다고 선언했어요. 실제로 이후 두 사람은 화해했고 다른 작품들은 다시 밀라노에서 공연됐지만, 나비부인만큼은 끝내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해요. 한 번의 실패가 작곡가와 극장 사이에 이토록 깊은 골을 남긴 거예요.
무너진 곡을 다시 짜다
푸치니는 좌절만 하고 있지 않았어요. 그는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된 지나치게 긴 2막 구조를 뜯어고치기로 했어요. 초초상이 밤새 남편을 기다리는 장면을 기준 삼아 2막을 둘로 나누고, 전체를 3막 구성으로 다시 짰어요. 이 과정에서 오케스트라 간주곡으로 쓰이던 부분에 합창이 얹히면서, 지금 나비부인을 대표하는 명곡 중 하나로 꼽히는 허밍 코러스가 새롭게 탄생했어요. 실패한 초연에서 오히려 이 곡이 태어난 셈이니, 위기가 만들어낸 뜻밖의 수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석 달 만에 뒤집힌 평가
수정된 버전은 그해 5월 28일 브레시아에서 다시 무대에 올랐어요. 결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같은 곡, 같은 이야기인데도 관객의 반응은 열광적이었고, 이 성공을 발판 삼아 나비부인은 순식간에 유럽 전역의 오페라 극장을 점령했어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영국 런던을 거쳐 미국 워싱턴과 뉴욕, 프랑스 파리까지 차례로 공연되며 인기를 이어갔고, 이후로도 몇 차례 더 손질을 거쳐 지금 우리가 보는 표준판으로 자리 잡았어요. 불과 석 달 사이에 최악의 실패작에서 대표작으로 뒤집힌 셈이에요.
실패를 대하는 태도
푸치니 이전에 이미 거장 반열에 올랐던 베르디도 초기작에서 큰 실패를 겪은 적이 있어요. 오페라라는 장르 자체가 관객 앞에서 즉각적으로 성패가 갈리는 만큼, 아무리 뛰어난 작곡가라도 실패를 완전히 피해가긴 어려웠던 것 같아요. 저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열심히 준비한 게 예상과 다르게 반응이 안 좋을 때, 그 순간엔 속상하고 억울한 마음이 앞서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정작 중요한 건 그다음이더라고요. 푸치니는 분노는 분노대로 다 쏟아내면서도, 정작 손볼 부분은 냉정하게 찾아내서 고쳤어요. 감정과 판단을 따로 떼어놓을 줄 알았던 거예요.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는 오페라 중 하나로 꼽히는 나비부인이, 사실은 이런 처절한 실패와 재기의 과정을 거쳐 완성됐다는 걸 알고 나면 이 곡이 조금 다르게 들릴 것 같아요.
참고: 헤럴드경제 문화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