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과의 첫 만남
1868년, 스위스 라이프치히 근교에서 스물넷의 젊은 문헌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리하르트 바그너를 처음 만나요. 당시 바그너는 이미 유럽 음악계에서 논쟁적이면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닌 거장이었고, 니체는 이제 막 학계에 발을 들인 신진 학자였어요. 그런데 두 사람은 나이 차이와 명성의 격차를 뛰어넘어 급속도로 가까워졌어요.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에서 그리스 비극이 지녔던 원초적인 힘을 발견했다고 여겼고, 이런 생각을 담아 자신의 첫 저서인 비극의 탄생을 세상에 내놓아요. 이 책은 사실상 바그너의 예술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작업에 가까웠고, 바그너 부부는 니체를 마치 자식처럼 아꼈다고 전해져요. 니체 역시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에 초대받을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각별했어요.
서서히 벌어진 틈
하지만 이 우정은 영원하지 않았어요. 1876년, 바이로이트 극장에서 상연된 니벨룽의 반지를 지켜본 니체는 뭔가 달라진 느낌을 받아요.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바그너의 음악에서,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기보다 연민과 체념으로 바라보는 염세주의적 분위기를 감지한 거예요. 니체에게 삶에 대한 강렬한 긍정은 철학의 핵심 가치였는데, 바그너의 음악이 점점 그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처럼 보였던 거죠. 이 무렵부터 니체는 서서히 바그너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해요. 흥미로운 건 니체 본인도 이 균열을 마냥 편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했다는 점이에요. 훗날 그가 남긴 여러 글을 보면, 우상이었던 인물을 넘어서지 않고는 자기 자신의 철학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절박함과, 여전히 남아 있는 애정 사이에서 갈등한 흔적이 짙게 묻어나요.
결정적 순간, 그리고 되돌아온 날 선 말들
결정적인 순간은 바그너의 마지막 작품 파르지팔에서 찾아와요. 성배의 기사 파르지팔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에는 짙은 그리스도교적 색채와 구원이라는 주제가 전면에 드러나 있었어요. 니체는 기독교적 가치를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서구 문명이 마주한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여겼던 사람이에요. 그런 그의 눈에 파르지팔은 그리스도교와 도덕주의에 굴복한 작품으로 비쳤고, 결국 니체는 바그너와 완전히 결별을 선언해요. 여기에 바그너의 국수주의적 경향과 반유대주의적 태도까지 겹치면서, 니체가 등을 돌릴 만한 이유는 여러 겹으로 쌓여 있었던 셈이에요.
절교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침묵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니체는 바그너의 경우와 니체 대 바그너라는 글을 통해 한때 자신의 우상이었던 인물을 정면으로 비판하기 시작해요. 흥미로운 건 바그너 쪽 반응이에요. 니체가 자신을 서서히 비판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바그너는 처음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나중에는 니체가 매독 때문에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다는 식의 발언을 남겼다고 전해져요. 한때 서로를 가장 깊이 이해했던 두 사람이, 이렇게 날 선 말들을 주고받는 사이로 변해버린 거예요.
관계가 남기는 것
이 이야기를 들여다보면서 저는 관계라는 게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엔 서로를 향한 존경과 애정으로 시작했던 사이가, 시간이 흐르면서 각자의 신념과 방향이 갈라지고 결국 돌이키기 힘든 지점까지 가버리는 경우가 있잖아요. 니체와 바그너의 절교도 그런 결의 이야기처럼 느껴져요. 니체 입장에서는 자신의 철학을 완성하기 위해서라도 바그너라는 거대한 존재를 넘어서야만 했을 거예요. 그렇다고 그 관계에 담겼던 애정 자체가 거짓이었던 건 아니었을 테고요. 오히려 그만큼 깊이 얽혀 있었기 때문에, 갈라선 이후의 감정도 그렇게 격렬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지금 우리가 파르지팔이나 니벨룽의 반지를 들을 때, 이 곡들에 얽힌 니체와의 이야기를 알고 듣는 것과 모르고 듣는 것은 감상의 결이 확실히 달라져요. 그저 웅장하고 아름다운 악극으로만 들리던 곡이, 한 철학자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우상과 결별해야 했던 흔적으로 다시 다가오거든요.
참고: 대학지성 In&Out 칼럼